Phase 01.
키보드 대신 공구를 잡다
0. 손끝에 감각이 붙고, 기름 냄새가 익숙해지는 과정은 분명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취미'의 영역을 넘어 이것을 진짜 내 '업(業)'으로 삼겠다고 다짐한 순간, 마주한 현실은 감각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14년 넘게 웹 퍼블리셔이자 서비스 기획자로 살며 '책상 위의 논리'로 세상을 보던 제게, 정비 현장은 매 순간 냉혹한 판단과 무거운 책임을 요구하는 실전 데이터 그 자체였습니다.
“이 기술로 내 삶의 고정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챕터는 제가 정비를 실제 '생계 수단'으로 진지하게 검토하며 마주했던 물리적, 경제적 현실에 대한 냉정한 기록입니다.
1. ‘Ctrl + Z’가 없는 물리적인 세계
기획을 하고 코드를 짤 때는 모든 것이 논리적인 구조 안에서 안전하게 움직였습니다. 오타가 나면 수정해서 ‘새로고침’하면 그만이었고, 잘못된 설계는 ‘실행 취소(Ctrl+Z)’나 ‘Git Revert’로 되돌릴 수 있었죠. 디지털 세상의 실수는 비용이 낮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하지만 정비의 세계는 달랐습니다. 힘 조절 한 번 잘못해서 뭉개진 나사선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버토크로 깨져버린 수백만 원짜리 카본 프레임 앞에서 '실행 취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 버그와는 차원이 다른 물리적 책임의 무게. 이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정비는 낭만이 아니라, 내 손끝의 선택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는 ‘냉혹한 실전’이라는 사실을요.

2. 시니어 기획자, 퍼블리셔의 효율 vs 주니어 정비사의 ROI
IT 업계에서 저는 꽤 효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감을 맞추고, 프로세스를 최적화하고, 팀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익숙한 14년 차 베테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비대 앞에서 저의 ROI(투자 대비 효율)는 처참했습니다. 숙련된 미캐닉이 20분이면 끝낼 변속 트러블 슈팅을, 저는 2시간 동안 붙들고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까지 기획했지만, 아직 숙련되지 않은 몸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빠른 손'이 곧 매출로 직결되는 현장에서, 제 비효율적인 노동 시간은 곧 비용이었습니다. 높은 연봉을 받던 시니어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아주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육체적 숙련도를 쌓아 올려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제가 정비사로서 마주한 첫 번째 '현타(현실 자각 타임)'였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나오며, 효율은 올랐지만 여전히 ROI는 낮습니다.

3. 감각의 즐거움 뒤에 오는 청구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숫자'였습니다. 주말과 퇴근 후 시간을 쪼개어 3년간 부업으로 현장을 경험하며, 저는 이 시장의 냉정한 수익 구조를 계산기를 두드리며 분석했습니다.
단순히 기술이 좋아서 샵에 직원으로 취업하는 일반적인 경로로는, 40대 가장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계산(Fatal Error)이 나왔습니다.
‘버그(Bug)가 발생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니, 삶의 로직이 꼬여버린 상황. 이 현실적인 청구서 앞에서 저는 감정적인 선택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 미리보기
Chapter 05: 냉혹한 현실의 데이터를 확인했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방식이 답이 아니라면, 나만의 방식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다음 챕터에서는 전업을 결심하고 맞이한 첫 겨울 비수기 동안, 14년 차 IT인의 경험을 살려 어떻게 나만의 '시스템'과 '무기'를 준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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